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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숙 시인의 시평론

이승현 시인 영상 앨범 2023. 1. 4. 13:04

주판을 내려놓고 

                  마음으로 되를 채우며

 

-이승현 시인의「셈 

 

박명숙

 

 

 

 

2003 유심을 통해 등단한 이승현 시인은 이호우시조문학상 신인상과 나래시조문학상, 서울시문학상 등을 수상한 관록의 시인이며, 오랜 기간 한국시조시인협회 실무를 맡아 중책을 수행해 온 시조단의 중견시인이다. 시집으로 파문』 『국화향 찻잔 속에 피네』 『·소리, 그리고』 『사색의 수레바퀴』 『아내에게 바치는 연가 등이 있다. 동아국제살롱전에서 입상한 사진작가로서의 명성을 살려 초대전 참가는 물론, 사진집 발간 공저자로 수차례 이름을 올린 경력도 지나칠 수 없다.

시조와 삶이 담백하다는 것은 기본기가 충실하다는 방증이다. 그의 시조와 언행은 고단수 기술을 쉽게 취하지 않는다. 가장 확실한 기준점에서 무리한 수를 두어 시야를 흐리게 하거나 목표를 빗나가게 하는 큰 실수를 범하지 않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들이 선명하게 구도가 잡히고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이 점에 기인한다.” 정용국 시인은 시인의 시세계를 이처럼 조명한 바 있다.

외유내강의 시인, 한없이 온유하고 따사한 성정을 타고난 듯싶지만, 불합리와 부조리 앞에선 사리를 분별하고 시비를 가려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시인의 시들은 인간과 삶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구축하고 천착해나가는 내공과 개성을 단단히 견지하고자 하는 의지와 결기가 남다르다 할 것이다. 결코 평이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고 유연한 시상과 호흡이 빚어내는 작품들은, 삶의 진정성을 깊이 담지한 성숙한 시정신과 함께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공감의 진폭과 파장 또한 만만하지가 않은 것이다.

 

살아온 시간들을 가만히 짚어보면

이문을 맘껏 보태 놓아보질 못했다

이 빠진 주판인 줄 모르고 알만 자꾸 놓았다

 

보태야 할 시간에는 헛손질 해대고

빼야 할 순간에는 덤으로 더 내주고

차라리 안 놓느니만 못한 수를 놓곤 했다

 

얼마 안 남은 해거름 더는 주춤할 수 없어

주판을 내려놓고 마음으로 되를 채우며

못다 판 나머지 것들은 그냥, 그냥 풀기로 했다

 

- 전문

 

주어진 하루를 조금씩 헐어내고 나면 얼마나 남게 될까. 시간은 모래와도 같다. 모래알로 치환된 시간은 쉬지 않고 과거로만 떨어지기에, 도리없이 늘 밑지는 현실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맛보기로 앞당겨오는 미래가 없듯, 늑장부리며 남아 있는 과거도 없지 않은가.

이 빠진 주판일 뿐인데 남은 주판알만 자꾸 놓아가는 하루하루. “이문을 맘껏 보태 보기는커녕 보태야 할 시간에는 헛손질 해대고/ 빼야 할 순간에는 덤으로 더 내주게 되어 차라리 안 놓느니만 못한 수를 놓곤 하는 삶은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더는 주춤할 수 없 얼마 안 남은 해거름 주판을 내려놓고 마음으로 되를 채우며/ 못다 판 나머지 것들은 그냥, 그냥 풀기로 작정한 시간들은 어쩔 수 없는 빼기의 삶을, 유한한 생의 허무를 접수할 수밖에는 없다. 속수무책의 세월 앞에 무엇이든 그냥 풀어버리자고 하루를 다독이고 위무하는 화자의 체념과 초월의지에 문득, 달관과 관조가 묻어난다.

 

결코, 짧지 않은 생 그냥 보낼 거냐는

아내의 잔소리를 성급히 뒤로하고

목줄에 사진기 걸고 새벽길 홀로 나선다

 

날숨을 토할 때마다 맺힌 고 풀어내듯

코끝에 맺히는 땀 셔터소리로 훔쳐내며

송골매 질주하듯이 피사체를 겨눈다

 

엎치고 비틀대다 한순간 멈칫하더라도

물집 잡힌 발바닥에 사진 한 컷 앉히면

태양도 두 손 꼭 쥐고 붉은 낙관 찍는다

 

-찍다 전문

 

수많은 사진작품을 찍었으나 살아서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사진을 공개한 적이 없었던, 거리의 포토그래퍼 비비안 마이어가 떠오른다. 경매에 부쳐진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된 15만 장의 필름들이 존 말루프의 페이스북에 올려지고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세상의 열렬하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된 은둔의 작가. 뉴욕의 거리와 사람들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카메라에 끌어들이곤 했던 그녀는, 보모와 가정부를 거쳐 노숙인으로 말년을 보낸 미스테리한 삶속에서도, 대상에 대한 비범한 관찰과 순간을 포착하는 예리한 눈빛을 놓친 적이 없었다.

이승현의 렌즈가 향하는 피사체들 역시 따뜻하고 아름다운 빛을 품는다. 어느 순간에도 이웃과 세상을 놓지 않고, 삶의 슬픔과 외로움의 지층 사이를 뚫고 들어서는 진실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다. 배려와 온정 속에서 태어나는 풍경들은 삶의 은유와 아우라를 깊숙하게 빚어낸다. 찰나의 직관을 누르는 정직하고 매혹적인 빛과 그림자의 변주에 오감을 곤두세우는, 연민과 성찰의 메시지도 인간적이다.

아내의 응원 같은 잔소리를 뒤로, 이른 새벽을 열고 나섰다가, ‘날숨을 내뿜는 렌즈의 눈동자로 송골매 질주하듯 피사체 한 컷을 낚아채 화면에 들어앉히는 순간마다, “물집 잡힌 발바닥 정도야 무슨 대수가 되겠는가. 태양도 다가와 붉은 낙관을 찍어주며 마지막 빛을 보탤 때까지, 하루는 온전히 찍사인 화자의 편일 뿐이다. 돌아오지 않을 순간의, 어디에도 없는 그림 한 장을 월척처럼 낚아서, 마침내 잔소리하던 아내에게로 돌아오는 그 하루의 황홀함이야 비길 데가 없을 것이다.

 

가슴으로 키운 새가 먼길을 가려나보다

날갯짓 겨운 소리가 마른 창을 치고 있다

날려고, 날려고 해도 끝내 날지도 못하면서

 

피멍 든 그대 깃털을 내 다시 품는다면

청동빛 녹슨 마음에 꽃 다시 피어질까

보듬고 또 보듬어도 풀리지 않을 저 눈빛

 

설운 맛 깊을수록 그대 노래 구슬프리

깃짓는 파동만큼 전해오는 이 아련함

가슴 속 조롱을 열고 그대 깃을 품는다

 

-신 귀촉도 전문

 

가슴으로 키운 새 한 마리. 시인에겐 그런 딸이 있다. 태국의 미얀마 난민촌 누포 캠프에서 만난 12살 소녀, ‘가시 속에 갇힌 꽃과 같았던 아이라고 한다. 국경의 밀림지대에 지어진 난민수용소지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던 사람들 속에서 만난 소녀와의 각별한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 여기는 밝고 티없는 웃음으로 시인의 가슴에 새처럼 깃을 들인 소녀다.

날려고, 날려고 해도 끝내 날지도 못하면서” “날갯짓 겨운 소리 마른 창을 치고 있는 새 한 마리. “피멍 든 그대 깃털을 내 다시 품는다면/ 청동빛 녹슨 마음에 꽃 다시 피어질까/ 보듬고 또 보듬어도 풀리지 않을  눈빛을 시인은 잊지 못한다. 시인의 딸로 살고 싶었던 소녀는 시인에게 오지 못하고, 난민촌이란 새장에 갇힌 딸을, 아비 되어 한국으로 데리고 올 수 없었던 시인도 딸을 향한 그리움과 아픔을 여전히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끝내 입국이 불허된 딸이다. 삶의 설운 맛이 깊어질수록 그대 노래 구슬퍼질 것이기에 깃짓는 파동만큼 전해오는 슬픔을 달랠 길 없어, 오늘도 시인은 가슴 속 조롱을 열고 피멍 든 깃털을 품고서, 녹슨 어린 마음에 다시 꽃이 피어나기를 간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경제적 논리와는 무관하며,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만 나눔을 실천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 소녀의 신변의 안위를 걱정하고 기도하는 시인의 사랑은 비단 시인의 것이기만 할 것인가. 미얀마 사태는 미얀마 국내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인권유린과 자유와 민주주의의 문제는 지구촌이 더불어 안고 가야 할 우선 과제다. 나눔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나누어주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의 행위라는 걸 난민촌 경험을 통해 더욱 깨닫고 새기게 된 시인의 마음이 아프게 투사되는 작품이다.

 

백두대간 적신 빗물 말간 정 고아내는

 

아버지 힘줄 같은 시원의 강물이여

 

굽이진 물길을 찾아 마른 대지 적셨다

 

 

청솔도 노송만큼 잔뿌리 촉촉이 젖고

 

고라니 멧돼지도 일가 이루게 하고

 

물소리 굴곡을 따라 세월 또한, 품었다

 

 

조선의 길을 열고 먼바다 벽을 넘어

 

거친 황하를 품고 북극성에 닿는 날

 

온 누리 만개하는 꽃 모두 와 목 축이리

 

-검룡소 전문

 

이무기의 전설이 서린 못, 검룡소는 한강의 발원지다. 대덕산과 함백산 사이 800 고지의 금대봉 기슭에 자리하며, 석회 암반을 뚫고 솟아난 지하수가 정선과 영월을 거쳐 한강과 합류한 뒤 서해로 흘러간다. 물이 마르지 않는 모천으로 한강의 탯줄이자 아버지 힘줄 같은 시원의 핏줄이기도 하다. “마른 대지를 적시는 그 물길을 찾아” ‘청솔 고라니 멧돼지도 굽이진 세월을 품어 왔다. 힘차게 솟구치는 어미의 탯줄이 길을 열고 먼바다 벽을 넘어/ 거친 황하를 품고 북극성에 닿는 날까지, ‘온 누리 꽃으로 만개할 그날의 한반도를 꿈꾸며, 영혼의 목을 축이는 화자의 염원도 간절한 노래로 다가온다. 서해를 거슬러 올라온 검룡이 여전히 꿈틀대고 있을 것 같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한강의 용출지, 태백의 명승지인 검룡소에선 해마다 한강대제가 열리기도 한다.

 

참나무 숯불덩이로 푹 고은 곰국이라도

졸면서 떠오르는

뿌연 것쯤은 있기 마련

오래된 장항아리에

곰팡이 피듯, 그렇게

걷다 보면 뭣 모르고

곁불도 쬐게 되고

꼬인 연줄에 걸려 헛발질도 하게 되지

그러니, 잉걸불인들

어찌 식지 않겠는가

뒷모습 서늘해짐은

가을 나무 보면 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국으로 남으려면

때때로 핵융합 하듯

화학반응 하는 거다

 

-아내시편 전문

 

오죽하면 전생의 원수가 이생의 부부로 맺어진다고 했을까. 피 한 방울, 살 한 점 섞이지 않은 남남이, 남녀가 만나 한 몸처럼 산다는 건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아내와 남편은 천륜의 관계는 아니다. 부모 자식 관계와는 다른 수평과 동반의 관계이다. 함께 노력하고 협력하는 관계이지만, 결혼과 함께 이름은 사라지고 관계 중심의 호칭만 남는 쪽은 아내다. 집사람, 며느리, 엄마, 형수, 올케, 동서, 시누이……. , 누나, 동생, 언니를 반납하고 얻은 호칭들이다. 부당한 차별을 거부하며 살아남아야 했던 직장과 사회를 떠나면, 지위도 이름도 지워진 불평등의 새 가정이, 눈도 입도 귀도 막아야 하는 부역의 새 시간이 세상의 아내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시는 어떤가. “뒷모습 서늘해진 가을 나무와도 같은 아내를 보며 뒤늦은 회한과 애련에 잠기는 듯한 남편의 시이긴 하지만, 진솔하고 거짓없는 세월의 진정한 성찰과 공감을 부르는 진술서라면, 어느 아내도 당해낼 재간이 없으리라. ‘곰국 뿌연 것 장항아리 곰팡이’, ‘곁불 꼬인 연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사랑의 잉걸불 같은 것은 진즉에 식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진국의 사이로 남기를 원한다면, 때를 노려 핵융합 하듯” ‘화학반응을 한번씩 일으키는 일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화자는 스스로 속다짐해보는 것이다. 흘러간 사랑은 돌아오기 어렵고, 식어버린 사랑은 불 지피기 심히 어려울 테니.

 

여인의 속치마에 속살이 얼비치듯

 

유혹인 듯 아닌 듯 실루엣 물안개

 

파도는 열정에 달아 닻 내리려 하누나

 

 

넌지시 걷어올린 앞섶의 뽀얀 둔덕

 

바람결 갈피마다 아스라한 물빛 비늘

 

천상의 별빛을 받아 몸을 씻고 있구나

 

 

못 이길 마음일랑 뭍에다 묻어두고

 

너에게로 가는 날엔 오체투지 하리라

 

천년을 기다린 그대에게 꽃 새기는 정으로

 

-무의도 전문

 

무의도는 마음의 어디쯤에 위치한 섬일까. 섬의 어떤 체취가 화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걸까. ‘물안개 실루엣 여인의 속치마에 얼비치는 속살처럼 유혹하는 무의도의 아침바다는 파도 열정을 달아오르게 한다. 안개를 넌지시 걷어올린 앞섶의 뽀얀 둔덕 바람결 갈피마다 아스라한 물빛 비늘 천상의 별빛으로 몸을 씻는 바다의 풍경을 신비롭게 연출한다. 움직이는 피사체의 순간순간을 놓칠 수 없는 작가로서의 섬세하고 치밀한 시선이 감각의 밀도와 결을 높이는 작품이다. “천년을 기다린 그대”, ‘오체투지의 경건한 마음을 재촉하는 섬. ‘으로 을 새기듯, 카메라 렌즈가 영혼의 꽃을 피워낼 무의도의 비경이 자못 궁금해진다. 관능과 신성이 만나는 감각의 땅, 지상의 섬이자 천상의 섬으로 그려진 무의도 시편이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자비와 사랑은 시인의 시정신을 끌고 갈 영원한 화두가 아닐까. 삶의 구원과 치유를 생각하게 하는 시인의 시편들은 시로써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며, 깊은 자성을 깨운다. 독자들은 창호에 비치는 따뜻한 등불과도 같은 그의 시를 과객처럼 찾아들며 마음을 뎁히고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 시의 효용이 무엇인지, 오직 공감과 소통을 향하는 작품들을 통해 말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시인의 등단작을 함께 읽기로 한다. 2003 유심에 첫선을 보인 작품이다.

 

개개비 한 소절은 가슴 속 노을 빛깔

 

골바람 메김 따라 억새꽃 휘날리고

 

하늘가 눈 붉힌 구름 닻줄을 감고 있다

 

뱃전에 부딪치는 메나리조 물방울

 

가라앉는 무게에 강여울 일렁이고

 

광목빛 들머리 소리 자갈길 굴러간다

 

저 건너 벼랑에다 넌지시 말도 걸며

 

산주름 갈피마다 한 박자 접는 뱃길

 

설핏한 저녁 안개로 밀려가는 그림자

 

-떠나는 길 전문

 

 

 

<박명숙>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 외.

- 시집 그늘의 문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