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시조

정형시학에 발표된 작품(귀가하는 대숲 바람, 지의류, 맘)

이승현 시인 영상 앨범 2025. 1. 26. 04:21

신작

귀가하는 대숲 바람

자그락대던 발소리가 잠잠해질 즈음

죽순의 먼 시간이 점점 선명해 지네

초승달 시원의 눈빛 그 차분함 그대로

첫 햇살에 길 나서서 댓잎과 힘겨루고

노을이 짙을 때까지 온 숲을 헤 젓다가

물 빠진 파 줄기 마냥 귀가하는 댓바람

우리네 사는 곳도 맹종죽 머문 숲도

별들이 자리 펴고 적요의 등을 켜면

꼬였던 숨결의 한낮이 실타래에 감긴다

 

지의류地衣類

우주 열기를 타고 이곳에 안착했다

한기의 시린 뿔에 숨의 솔기가 터져도

두 주먹 불끈 쥐고서 활기의 맥 돌렸다

부서진 스레트에 비닐 창 펄럭이는

냉기에 떠는 할미꽃 빈속을 데워 주려

숨차게 계단을 오르는 도시락 온기처럼

동토를 덮고 있는 땅의 옷 푸른 결기

서울시 재개발구역 돌담에 피어올라

동장군 서슬을 녹이며 새봄 여는 전령사

지의류地衣類 : 이끼와는 달리 조류와 균류의 공생체로서 땅을 제일 먼저 덮은 생명체

 

한 떨기 눈꽃처럼 사르르 피고 지는

마음의 한 종지가 천지보다 더 넓다

참깨의 씨눈 속에도 은하수가 흐르듯

회오리 기둥 속에 얽히고설킨 잡동사니

누르고 누르려 해도 깨지고 치솟으며

제자리 찾지 못하는 내 사유의 방랑벽

뇌리의 궤적들이 억겁의 길이라도

찰나의 바늘 끝에 터지는 풍선처럼

아내의 잠꼬대 소리가 내 단꿈을 먹었다

이승현

2003 유심 등단. 나래시조문학상, 이호우시조문학상 신인상. 서울시문학상. 올해의 좋은시조집상 수상. 빛 소리 그리고, 사색의 수레바퀴, 아내에게 바친 연가.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