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지역에는 강원도 못지 않은 절경이 곳곳에
비경으로 남아 있는 곳이 많습니다.
청량산이 그런 곳 중 하나일거란 생각을 합니다.
지난 가을 끝 무렵
청량산은 단풍으로 한껏 자태를 뽑내고 있었습니다.
잘 보이지 않아도 잘 들리지 않아도
언덕엔 흙이 쌓이고 물은 고여 우물이 깊다
세상은 말없이 흐르다 검지 높이 올린다
-- (홍성란 <계집종> 일부)
멀리 아침 안개가 다 걷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언덕엔 흙이 쌓이고 물은 고여 우물이 깊듯이
청량산 가는 길은 이렇게 웅숭깊게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말없이 흐르다 검지 높이 올리듯 청량산을 치켜 세웠습니다.
멀리서 바라봐야 제 모습 보인다지만
애초 하늘 버리고 무릎 맞대 앉은 산
깊고도 그윽한 속내가 졸졸졸 정겹다
길은 낡았어도 향기 짙은 가을 햇살
누가 알기나 할까 저 이파리 속 벌레 울음
검불은 제 속을 비워 광배를 드리운다
-- (권갑하 <각연사 가는 길> 일부)
그렇습니다. 청량산을 오르는 길은 나를 비우며 오르는 길이 되어야했습니다.
멀리서 봐야 제 멋을 알수 있다는 것과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 갈수록 알수 있는 것이 또 산이 아닐까 합니다.
내려다 보이는 길이 마치 제가 살아온 이력서같습니다.
구불텅구불텅한 길의 모습에서 제 뒷모습을 그려 봅니다.
빈집 장독대
고요가 모여서
탱탱한 석류알을 키우고 있었구나
양철 문
가시 울타리
다 부서진 담장 안에도
-- (문희숙 <독가촌을 지나며> 전문)
청량산 응진전에 있는 장독대가 햇살 아래 참 곱습니다.
검은 콩으로 만든 메주가 처마자락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아마도 저 항아리 안에는 작년에 그렇게 매달려 있던 검은콩으로 쑤워 만든 장이 익어 가고 있겠지요.
그리고, 또 한 항아리에서는 탱탱한 석류는 아니더라도 매운 맛이 듬뿍 배인
진득한 고추장이 맛깔스럽게 익어 가고 있겠지요.
후회로구나
그냥 널 보내놓고는
후회로구나
명자꽃 혼자 벙글어
촉촉이 젖은 눈
다시는 오지 않을 밤
보내고는
후회로구나
-- (홍성란의 <명자꽃> 전문)
동행한 여인보고 기도하는 모습을 연출해 달라고 했더니 아주 폼을 멋드러지게 잡습니다.
NG 한 번 안내고 이렇게 사진이 나왔습니다.
전속 모델로 계약을 하자는 것...
아직 미루고 있습니다.
참! 그건 그렇고 그 짧은 순간에 무엇을 빌었냐고 물었더니...
입을 가리며 그건 비밀이라 카네예
그래서 후회할 일은 하지 말라고
홍성란 시인의 명자꽃을
갖은 폼 다 재며 멋드러지게 낭송해 주었습니다.
가 이를까, 이를까 몰라.
살도 뼈도 다 삭은 후엔
우리 손깍지 끼었던 그 바닷가 물안개 저리 피어오르는데,
어느날
절명시 쓰듯
천일염이 될까 몰라.
-- (윤금초의 <천일염> 전문)
이 단풍잎이 다 삭은 후엔
저 석탑도 하나의 천일염이 될까 몰라
아니, 내 어느 절명하는 날...
천일염 같은 오롯한 시 한 수 남길 수 있을까 몰라
멀리 바라다 보이는 하얀 석탑이 어느 날 바람 한 줌에 물안개 피어올리듯
내게도 그런 날이 올까 몰라...
어렵다 어려워, 그냥 산이나 오르자..
지등紙燈이 아니래도 마음 엷게 젖습니다
베겟머리 근처에서 생각 한 잎 돋습니다
세상의 살아 있는 모든 것 조금씩 야윕니다
-- (서숙희의 <그리움의 시> 전문)
단풍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청량산도 비워져가고, 천년고찰 풍경소리도 비워져가고 있습니다.
산사에서 듣는 염불소리는 바람소리와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비워가고 있는 거라고,
아니 야위어가고 있는 거라고... 그리움마저도 야위어 가는 것이라고.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 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 (조오현 스님의 <무자화6-부처> 전문)
소리도 없는 법고를 진탕 울게 해놓고
소리도 없는 법고를 마구 울게 해놓고
소리도 없는 법고를 두둘기며 가는 바람.
패러디도 이 정도의 패러디는 애교가 있는 표절이 될 수 있을까요?
오직 자신의 본 모습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무산스님의 시어들을 후생에 가서라도 해독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격이 높은 법고소리를 들을 날을 기다리려면 청량산에 한 번 눌러 살아 보라 카네요. 저 종루가
자잘한 가지 사이 나도 한 땀 가지 되어
손끝 발끝 아슬아슬 뻗어본다 자벌레로
이토록 나무가 된다
네가 된다
어둠이여.
-- (김일연의 <사랑> 전문)
그렇게 그렇게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정상에 섰습니다.
갖은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정상에 섰습니다.
그 정상에는 다름 아닌 사랑이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자벌레가 나무를 재는 것은 자신도 나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정상에 서니 비로소 나에 대한 사랑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태 남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살던 눈길이
이제는 제 안의 나를 사랑해 보라는 소리를 비로소 듣게 되었습니다.
제 안의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남을 사랑할 수 있으며,
남의 사랑을 온전하게 받을 수 있겠느냐고...
깊은 우물 같은 길을 만나고, 높이 올라야 산 아래 걸어온 뒷모습을 볼 수 있는 길도 만나고
시원한 냉수 한 사발 들이키는 것 같은 암자에서의 염불 소리도 만나고,
맛깔스런 장 익는 향기도 맡는 그런 시간도 있었고,
그 어떤 시간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라는 풍경소리도 만났고,
살도 뼈도 다 삭은 후에나 만날 수 있는 그런 천일염 같은 시간도 만났으며,
그런 길을 걸으려며 야위어 가듯 몸과 마음을 비워야한다는 이치도 봤으며,
특히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큰 울림 같은 법고소리도 들어가며
정상에 오르니.
그 모든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틀에 담겨 있다는 경구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사랑을 제대로 한 번 해 봐야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올바로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봐야겠습니다.
그래 나부터 나 자신을 정말로 진실하게 제대로 한 번 사랑해 보자
사랑해 보자. (이승현)
'여행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잠시 머리를 식히러 가기 좋은 곳 북한산 태고사 보우국사부도탑 (0) | 2013.03.20 |
|---|---|
| 무의도를 찾아서 (0) | 2013.03.19 |
| 기차여행의 별미 정동진역, 추암역을 찾아서 (0) | 2013.03.16 |
| 우포늪 (0) | 2013.03.16 |
| [스크랩] 신년산행② (0) | 2013.01.14 |